2014-12-02 오전 10:59:50
1. 철기시대의 시작
인류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불의 이용이나 나침반, 종이 및 화약의 발명과 같이 문명을 진일보시키는 과학기술이 있었다. 이러한 과학 기술 중에서 금속의 사용은 소재 측면에서 가장 획기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으며, 수많은 금속 중에서도 철의 사용은 매우 중요하다. 청동은 희소성 때문에 용도와 사용자가 극히 제한적일 수 밖에 없었다. 반면 매장량이 풍부하고 지역 편재가 적은 철의 발견은 철의 대중화로 이어졌다. 고고학자들의 견해에 의하면 인류는 기원전 6,000년 부터 금속을 알고 있었으며, 기원전 1200년 즈음에는 지구의 여러 지역에서 철을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덴마크의 고고학자 C.J 톰슨이 인류 역사의 발전단계를 석기시대, 청동기 시대, 철기 시대로 구분하는 학설을 제기하여 이제까지의 시대 구분으로 받아들여져 왔으나, 청동기 시대라는 설정에 반대하는 논란도 있어 왔다. 청동은 구리와 주석의 합금으로 외관이 미려하고 내식성이 우수하여 주로 청동 조각이나 장신품 등에 사용되나, 무르고 깨지기 쉬운 성질로 무기나 연장의 재료로 사용하기는 어렵다. 청동기 시대 구분에 대한 반대의 주된 이유는 구리와 주석의 산지가 한정되어 있어 사회 전반에 보급되지 않았고, 생산용구로는 사용할 수 없다는 특성으로 상층 계층에 한정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청동기 시대에서 철기 시대로 변화 발전 했다는 이론은 보편적 해석이 아니고 철기 및 금속기 시대로 불리어져야 한다는 주장이다. 청동기 유물과 부장품 등으로 남아 있는 것은 청동기 유물이 녹이 슬지 않고 유지되었기 때문이다.
인류가 최초로 철을 사용하게 된 경위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는데, 청동의 원료인 동석을 채광하던 중 비슷한 색깔을 내는 적철광을 채광한 후 제련과정을 거치면서 철을 발견했다는 ‘채광 착오설’이 있다. 다음으로 지표에 존재하는 철광석이 산불에 녹아 철의 존재를 알렸다는 ‘산불설’ 이 있는데, 현실적인 가능성을 높게 인정받고 있는 것은 ‘채광 착오설’이다.
인류의 철기시대 진입에 가장 큰 기여를 한 고대 국가는 히타이트였다. 히타이트 인들은 쇠를 녹여 철기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쇠와 불순물이 섞여 있는 스펀지 형태의 덩어리를 두드려 단철(鍛鐵)을 만들어 사용했다. 당시 히타이트인의 야금 기술은 지구상에서 독보적이었고 이들이 거주하는 지역에 철광석이 풍부했기 때문에 고대 철기국가로 발전하게 된다. 4대 고대 문명 가운데인 중근동 지역의 문명이 가장 먼저 시작되고 발전한 이유는 히타이트 인들의 철기 제조 기술덕분이다.
동북아시아의 경우 중국의 춘추시대 이후 단조 철기와 거의 동시에 주조 철기가 세계 최초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1868년 플라스틱이 발명되고 20세기 이후 세라믹 신소재에 대한 연구가 집중되고 있지만, 철기 시대 출현 이후 철만큼 인간에게 많이 사용되는 소재는 아직 없는 듯 하다.
2. 근대 철강 기술의 발전
철광석을 녹여 철을 만드는 과정은 환원공정이라는 화학반응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 환원공정에서는 철광석을 녹일 정도로 높은 열을 내면서 철로 환원시킬 수 잇는 탄소를 다량 함유한 연료가 필요하다. 고대 대장간부터 17세기 제철소까지 철을 만들 때 주로 사용된 연료는 목탄이었다. 그러나 목탄은 제철과정에서 발생하는 화력에 의해 쉽게 타버렸기 때문에 철 1톤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목탄 1,000톤이 필요했다. 따라서 목탄을 연료로 할 경우에는 생산되는 철의 양이 적을 수 밖에 없었고 품질도 좋지 못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한 이가 영국의 에이브러함 다비(Abraham Darby)이다. 철제 용기를 만드는 일을 하던 다비는 어느날 탄광용 펌프에 사용할 실린더의 제작 주문을 받는다. 다비는 좋은 실린더를 만들기 위해서는 철의 품질 개선이 필수라고 생각했지만 당시 제철소는 이에 적합한 철을 제대로 생산할 수 없었다. 그래서 다비는 스스로 제철업에 도전하기로 결심했다. 사실 다비 이전에도 목탄을 석탄으로 대체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황 성분이 많아 실제로 활용되지는 못하였다. 다비는 제철소 건설지로 콜브룩데일을 선택했다. 콜브룩데일은 철광석이 풍부하고 황 성분이 적은 석탄을 구하기도 쉬운 지역이었다. 다비는 6개월여 동안 실험을 거친 후 1735년에 코크스 제조법을 개발하는데 성공했는데, 이는 석탄을 코크스로 만들고 이것을 연료로 철을 대량생산하는 방법이었다. 그는 품질이 좋은 석탄을 밀폐된 코크스로에 장입한 다음 고온으로 건류하여 코크스를 만들었다. 동시에 철광석과 코크스가 오랫동안 접촉할 수 있도록 적절한 크기의 용광로를 제작하였다. 그렇게 하면 코크스가 용광로 안에서 일산화탄소를 발생시켜 철광석을 충분히 환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용광로 조업의 전기가 되었고 영국 제철업계 발전의 기초로서 산업 혁명에의 길을 여는 원동력이 되었다.
다비가 개발한 코크스법은 그의 아들과 손자를 거치면서 기술적 진화를 하였다. 다비 3세는 세계 최초의 철교인 아이언 브리지를 건설하기도 하였다. 콜브룩데일의 세번강에 세워진 60미터의 아이언 브릿지는 1950년대 까지 실제로 사용되었고, 지금도 원래 모습으로 보존되어 있다.
다비 가문의 노력으로 18세기 후반에 코크스 제조법이 확산되었는데 코크스 용광로는 1700년대 말까지 86개로 증가하였다. 제철소의 입지도 석탄 공급이 원활한 지역으로 이동하게 되어 1800년대 전후로 제철소의 75%가 탄전 주변에 세워지게 된다.
코크스법을 발전시킨 영국의 철 생산량은 1740년에 1만 7000톤에서 1850년에는 270만 톤으로 비약적인 성장을 하면서 당시 세계 생산의 절반을 담당하게 되었고, 영국은 산업혁명을 주도하는 강대국으로 발전하게 된다.
3. 강철 시대를 연 베세머
우리가 흔히 말하는 철강(Iron & Steel)은 탄소 함유량을 기준으로 구분하는 선철과 강을 지칭하며, 강철(鋼鐵) Steel은 탄소를 2% 이하 함유하는 것을 말한다. 18세기 다비에 의해 대량으로 선철을 생산하는 방법이 개발되었으나, 철의 대중화로 이어지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탄소 함유량이 많고 불순물을 함유하고 있는 선철(銑鐵)은 부러지기 쉽고 가공에 취약한 단점이 있었다. 따라서 선철로 구조물을 건설하더라도 하중에 견디는데 제한이 있었고 제품을 가공하는 정밀도에도 한계가 있었다. 선철을 재 정련하여 탄소를 1.7% 이하 수준으로 낮춘 강은 강하고 질기며 가공성이 우수한 장점이 있다. 이러한 강철을 대량으로 생산하는 법을 발명한 사람이 영국의 헨리 베세머이다.
베세머는 대포를 생산하면서 포신이 발사시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깨지는 문제에 대하여 이를 해결하려면 우수한 강철의 적용이 핵심이라고 생각했다. 당시에도 도가니 제강법이라고 불리는 방법이 있었으나, 대량생산이 불가능하고 제조 비용도 많이 들었다. 베세머는 다양한 실험을 하면서 새로운 제강법을 개발에 매진하여 1855년에 회전이 가능한 항아리 모양의 전로(Converter)를 이용하여 강철을 개발하는 방법을 개발하였다.
베세머 제강법이라고 불리는 이 전로 제강법은 산화과정에서 생성된 열을 활용하여 선철에 공기를 불어넣음으로 탄소를 제거하여 철속에 포함된 탄소를 조절할 수 있었다. 베세머 제강법의 장점은 기존 기술 대비 10배이상 빠른 처리 속도와 우수한 제강 능력이었다. 기존 제강법이 200Kg 단위에서 작업이 가능햇던 반면 베세머 전로는 한번에 20톤가지 작업이 가능하였다. 이는 강철 생산의 비약적 발전을 이어졌는데, 유럽의 연간 강철 생산은 25만톤에서 1,000만톤으로 증가하였다. 산업 혁명의 후발 주자였던 미국과 독일은 베세머 전로법을 재빨리 적용하여 제조업의 강자로 부상하였고 강대국의 판도도 바뀌었다. 강철의 대량 생산은 선박과 무기 등의 발달에 영향을 끼쳤으며 석조 건물의 한계였던 5층 높이를 뛰어넘는 고층 건물의 출현으로 이어졌다.
베세머는 1879년 영국정부로부터 업적을 인정받아 기사작위를 받았으며 왕립학회의 회원으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또한 1874년부터 제정된 ‘베세머 금상’은 철강산업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권위를 아직까지 지니고 있으며, 1987년에는 포스코의 고 박태준 명예회장이 베세머 금상을 수상했다.
4. 제강기술의 발전
베세머 전로법의 발명으로 강을 대량으로 생산하는 시대가 도래했지만, 품질에는 한계가 있었다. 특히 인을 0.1% 이상 포함하는 철광석으로는 강의 품질을 맞추기 힘들었다. 따라서 베세머 전로법을 활용할 수 있는 철광석은 인을 함유하지 않은 적철광으로 한정될 수 밖에 없었는데, 양질의 적철광을 얻을수 있는 철광석 산지는 유럽의 20%에도 미치지 못하였다.
베세머 전로법으로 제어하지 못하는 문제를 해결한 제강법이 토머스의 염기성 제강법이다. 토머스는 야간 대학에서 하학을 공부하며 ‘베세머 전로에서 인을 제거한 사람은 행운을 얻을 것이다’라는 강의를 듣고 새로운 전로법 개발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토머스는 용선중의 인을 산화시켜제거하려면 산성인 산화 인이 염기성 슬래그에 머물러야 하고 염기성 슬래그를 사용하려면 제강로 내벽도 염기성 내화물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염기성 전로를 제안한다. 토머스는 염기성 내화물에 적합한 물질을 찾기 위해 수많은 실험을 거치며 찾아낸 것이 탄산 칼슘과 탄산 마그네슘의 혼합물인 백운석이었다. 동시에 토머스는 내화물을 적절히 가공하는 방법을 고안했으며 타르를 점결제로 사용하면 효과가 있다는 점도 벌견하였다.
토머스는 염기성 제강법을 소개하였으나, 학계의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이스턴 제철소가 그의 특허를 매입하여 1879년에 염기성 전로가 세상에 출현한다. 토머스 전로법의 출현으로 인이 많이 포함된 철광석으로도 강철을 제조할 수 있게 되었다. 염기성 전로법은 유럽 각지에 전파되었고 염기성 전로법의 부산물로 생성된 인산염은 비료로 사용되어 농업의 발전에도 기여한다.
이후 20세기에 들어서 제강법은 꾸준히 기술 발전을 하여 1952년에는 오스트리아의 린츠 제철소와 다나비츠 제철소에 도입된 산소 제강법은 1960년대 이후 전 세계에 보급되어 오늘날의 제강법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 산소 제강법은 두 제철